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불은 모든 것을 태워 없애지만, 어떤 것은 소멸 이후 더 깊은 존재로 남는다. 나무가 불을 지나 숯이 되듯, 이배의 작업은 사라짐 이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를 향해 있다. 검고 비어 있으면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품은 물질, 숯. 그 침묵의 물질을 30여 년간 붙들어 온 작가 이배가 강원도 원주의 자연 속에서 다시 자신의 근원을 펼쳐 보인다.
한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뮤지엄 SAN(관장 안영주)은 오는 4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이배(1956~)의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이배의 전 작업 세계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며, 뮤지엄 SAN 전체를 하나의 전시장으로 확장해 선보이는 프로젝트다.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작가의 사유와 조형 세계를 공간과 시간의 경험으로 번역한 장소특정적 전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시 제목인 《En attendant》는 프랑스어로 ‘기다리며’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기다림은 막연히 시간을 견디는 수동적 상태가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어떤 생성의 순간을 향해 응축되고 있는 시간,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숯이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그러하다. 나무는 가마 안에서 불에 타며 본래의 형체를 잃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오랜 시간 식어가며 또 다른 물질로 다시 태어난다. 이배는 바로 그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사이를 견디는 시간을 예술의 본질적인 상태로 읽어왔다. 이번 전시는 숯이라는 물질을 통해 시간과 존재, 자연의 순환을 조형적으로 드러내며, 관람객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이배에게 숯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자 몸이고, 자연이며 정신이다.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농부의 아들로 자란 그는 유년기의 생활 감각과 노동의 기억, 동아시아적 사유의 바탕을 작업 안에 깊게 새겨왔다.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그는 서구 현대미술의 다원적 흐름 속에서 오히려 가장 한국적이고 근원적인 물질인 숯으로 되돌아갔다. 낯선 환경 속에서 마주한 숯은 단지 재료의 선택이 아니라, 작가 내면에 잠재돼 있던 정신성과 조형 감각을 깨우는 철학적 매개체가 됐다.
이배는 1999년 이후 〈불로부터(Issu du feu)〉 연작을 통해 숯을 물질성과 정신성이 교차하는 매체로 재정의해 왔다. 이후 숯가루와 밀랍, 아크릴 미디엄을 결합한 회화, 신체의 호흡과 행위를 수행적으로 담아낸 〈붓질(Brushstroke)〉 연작 등으로 작업을 확장하며 독보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 그의 작업은 소멸을 지나 응축된 생명력, 그리고 비움 속에 잠재한 에너지를 끝없이 환기해 왔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이유는 이배의 작업이 단지 전시장 안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뮤지엄 SAN의 건축과 자연, 동선 전체와 맞물리며 하나의 유기적 경험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뮤지엄 SAN이 지닌 Space·Art·Nature의 철학은 이배 작업의 본질과 긴밀하게 호응한다.
안도 타다오 특유의 절제된 노출 콘크리트 건축, 산자락의 풍경, 빛과 침묵이 만들어내는 장소의 감각은 이배가 추구해 온 세계와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 과장보다 절제, 설명보다 체험, 장식보다 물질의 본질에 집중하는 태도는 양쪽 모두를 관통한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접점을 전시 구성의 핵심으로 삼았다.
관람객은 본관 입구에서 시작해 갤러리 로비와 청조갤러리 1·2·3, 야외 ‘무의 공간’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 공간을 따라 이동하며, 이배 작업의 물성과 정신성이 단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전시의 시작은 뮤지엄 본관에 설치된 대형 작품 〈불로부터(Issu du feu)〉다. 높이 8미터, 폭 5미터, 무게 7톤에 달하는 이 설치는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의 몸을 압도한다.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였던 작업의 확장형으로, 불을 통과해 태어난 숯의 존재를 거대한 조형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숯은 여기서 정화와 치유, 순환의 상징이자, 시간이 응고된 물질로 다가온다.
이어지는 청조갤러리 로비에서는 〈붓질(Brushstroke)〉 16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자연광이 스며드는 공간 속에 놓인 작품들은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이배의 붓질은 단순한 회화적 제스처가 아니라, 호흡과 리듬, 수행의 흔적에 가깝다. 거대한 획이 놓인 공간을 걷는 경험은 마치 한 편의 풍경 안으로 들어가는 감각을 만든다.
청조갤러리 1·2는 각각 〈White〉와 〈Black〉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배에게 검정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빛을 모두 흡수해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심연이며, 흰색은 여백과 빛, 열림의 공간을 의미한다. 두 색은 서로 대립하기보다 음양처럼 상호 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룬다. 전시장은 이 관계를 단순한 시각적 대비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 충만과 공백,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감각의 장으로 풀어낸다.
청조갤러리 3에서는 이번 전시의 핵심 신작인 〈Becoming〉이 처음 공개된다. 높이 9미터에 달하는 대형 스크린에는 작가가 논 위에서 직접 붓질하는 행위를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그 아래에는 청도 작업실에서 옮겨온 흙으로 구현한 논 설치가 펼쳐진다. 전시 기간 동안 실제 식물이 자라나는 이 공간은 미술관 안에 ‘살아 있는 시간’을 들여놓는다. 이 작품은 회화와 설치, 영상, 생태적 시간성이 결합된 복합 작업으로, 결과보다 과정과 생성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사유를 가장 밀도 있게 응축한다.
전시의 마지막은 야외 ‘무의 공간’이다. 이곳에는 높이 10미터 규모의 브론즈 〈붓질〉 6점이 설치돼 있다. 주변의 나무와 산세, 건축의 지붕선과 호응하도록 설계된 이 작품들은 조각이자 풍경의 일부로 기능한다. 실내에서 보았던 붓질의 리듬이 야외로 확장되며, 조형과 자연, 건축과 몸의 동선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이배의 30년 작업을 정리하는 자리를 넘어, 그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숯을 통해 물질의 외형을 다루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시간과 생명, 침묵과 수행의 감각을 조형 언어로 전환해 왔다. 그의 검정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사유의 밀도이며, 그의 붓질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이다.
오늘날 이미지와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이배의 작업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빠르게 소비되는 장면이 아니라 오래 바라볼수록 더 깊어지는 물질, 즉각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몸으로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감각을 제시한다. 이번 전시는 관람객에게 단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한편 뮤지엄 SAN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작품의 물성과 건축, 자연이 긴밀하게 호응하며 관람객이 공간을 직접 경험하도록 기획됐다”며 “잠시 멈춰 서서 자신과 자연, 시간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불을 지나 검게 남은 물질은 더 이상 소멸의 잔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도 끝내 남아 있는 시간의 형태다. 이배의 전시는 그 검은 시간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기다림을 조용히 떠올리게 된다.
전시 기간 중에는 작가와의 만남, 큐레이터 투어, 예술명상 프로그램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