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50년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사이 차이가 사람들이 생각하기 힘든 차이가 몇가지 존재한다. 어느새 클럽팀이 국가대표보다 더 큰 이슈를 몰고 다닌다. 많은 사람들은 리그가 FA컵보다 더 중요한 경기였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강팀을 이야기할 때 그러면 하얀발레라고 칭해지는 레알 마드리드 정도를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클럽팀은 어디가 있을까. 유럽 클럽 대항전 중 가장 무게가 있는 대회가 그 때도 챔피언스리그였을까. UEFA챔피언스리그는 1990년대 그 전에 있던 유럽컵을 확대시키고 컵위너스컵을 흡수하면서 현재 유럽에서 가장 권위있는 클럽대항전으로 성장했다.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럽컵은 현재의 위상에 비하면 초라했다. 그리고 현재는 패배자의 리그라고까지 평가되는 UEFA컵의 위상은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또한 가장 큰 권위가 있는 대회는 컵위너스컵이었다. 이것은 자국 클럽이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는 타이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1950년대 클럽들이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는 타이틀은 FA컵이다. 지금은 리그우승이다. 아무튼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1950년대 유럽의 최강 클럽을 꼽으라고 한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다시 한 번 히데쿠티의 말을 인용한다. "내 자리는 보통 자카리아스 옆의 필드 가운데 근처였고 다른 측면에 있던 보지크는 종종 상대 페널티 애리어까지 올라가서 꽤 많은 골을 넣기도 했다. 최전방에는 최고의 골잡이 좌우공격수 푸슈카시와 코치스가 있었고 W-M 시스템보다 골대에 더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새로운 얼개를 잠깐 실험하고 나서 세베시(감독)는 두 명의 윙에게 보지크나 내가 보내는 패스를 받기 위해 미드필드 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도록 했다. 이 마지막 손질로 전술개발은 완성되었다." 존스턴이 히데구티를 따라 올라가면 플백 사이에 구멍이 생겼고, 떨어뜨려 놓자 마음대로 경기를 지휘하며 휘젓고 다녔다. 웸블리에서 영국은 히데구티에게 헤트트릭을 허용하며 6:3으로 패배한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당시 히데구티에 가까운 현대 선수를 찾으라고 한다면 2000년 유럽컵에서의 지단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당시 헝가리는 푸슈카시, 히데구티, 코치시, 보지크, 치보르라는 당대 최고의 선수를 보유했고 이 뒤에는 세베시라는 감독이 있었다. 세베시의 전술노트에는 최고 선수들을 한 팀으로 묶어내기 위한 고민이 묻어난다. 센터하프인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조기축구회에 어느 날 프로 선수가 경기를 한다면 어떨까. 대여섯명의 선수가 들소처럼 콧김을 몰아쉬며 들이닥치는 모습에 골키퍼는 슛이 오기 전에 이미 위축되고 말 것이다. 1953년 11월 웸블리 구장에 있었던 영국 선수들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제의 선전도구로서의 축구는 적어도 서구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어버렸다. 또 하나는 축구 종가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갈라파고스화하던 영국 축구의 세계무대의 재입성(월드컵출전)일 것이다. 그리고 1953년 헝가리 축구팀의 영국 방문경기는 뜬금없는 '최강 잉글랜드' 신화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 경기가 된다. 1949년 자국에서 아일랜드에게 패한 것은 그러려니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것은 미주 원정이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53년 자국 팬들 앞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하면서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헝가리는 20세기 전반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당연히 부다페스트도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축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헝가리 축구 역시 유고 메이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34년과 1938년 월드컵의 우승팀은 이탈리아다. 당시 이탈리아가 최강팀인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전술로는 1회 때 아르헨티나의 센터백으로 뛰었던 몬티가 조금 더 수비적으로 옮겨갔다는 정도 빼고는 파시즘의 선전도구였다는 것에서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다. 또한 독일의 경우 W-M 전술을 받아들이고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역시 나치즘의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소련은 유럽의 변방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축구가 늦게 꽃을 피웠다. 소련 중심부는 국제적인 축구전술의 변화에 무감했다. 다만 서쪽은 지리적인 영향 때문에 다뉴비언 스쿨에 영향을 받았다. 1936년 처음 자국 리그를 출범시킨 소련은 이듬해 바스크팀의 방문(스페인 내전 중 바스크인의 뜻을 알리기 위해 펼친 순회경기)과 함께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소련 축구의 현주소를 뼈저리게 느낀다. 1무를 포함한 연패 속에서 소련은 자국 클럽의 상징인 스파르타크와의 경기에서 지금은 불가능한 일을 저지른다. 다른 클럽에서 선수들을 끌어 모은 것이다. 사실상 소련 대표팀이었던 당시 '급조된' 스파르타크는 또 하나의 급조된 전술을 사용한다. 센터하프의 수비위치로의 이동이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39년 1월 구스타프 하르트만은 아가니세에 어느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남녀 한쌍이 있었다. 그때 이미 여자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고 남자는 하르트만이 발견했을 때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당시 독일에게 병합된 오스트리아 원더팀의 공격수 마티아스 진델라르다. 진델라르는 별명이 'der Papierene'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체로 센터포워드는 상대 수비의 육탄방어를 뚫을 수 있는 당당한 체구의 선수를 선호한다. 진델라르의 등장은 센터포워드가 섬세한 타이밍, 감각, 연습한 것 위에 쌓인 창의적인 발상을 함께 갖는 선수로 진화했음을 뜻한다. 당시 진델라르를 평한 평가는 어떤 방식의 플레이를 할 지 예상할 수 없는 천재성을 지닌 선수라는 것이다. 1920년대 닥터 게로컵에서 이탈리아에 이은 준우승을 거둔 유고 메이슬의 오스트리아는 이 천재적인 공격수, 진델라르를 선발하라는 압력에 시달린다. 이 압력 덕분에 진델라르는 1926년 국제무대에 데뷔를 했으나 메이슬은 처음에는 그다지 그를 중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1년경 메이슬은 진델라르를 붙박이로 쓰게 된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채프먼 이전에도 센터하프를 현재의 센터백으로 내리는 일은 존재했다. 하지만 1925년부터 아스널에서 5년 임기를 보장받은 채프먼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에게 7대영 대패를 당하면서 시스템의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상대가 사용했던 전술, 다시 말해 센터하프를 수비 위치로 내리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 중앙에 선수가 부족해졌다. 이를 공격수에서 끌어내려 메운다. 기복은 있었으나 채프먼은 1930년 드디어 아스널을 FA컵 우승으로 이끈다. 1930년 아스널의 백은 좌우 윙어를 막았고 후퇴한 센터하프가 상대 중앙 공격수를 견제하고 윙하프는 상대 좌우 공격수를 막았으며 좌우 공격수는 뒤로 물러나는 전술을 만들어낸다. 바로 W-M 전술시스템이다. 이 전술은 1930년대 전반의 최강팀 아스널을 만들었고 새로운 영국 국가대표 시스템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영국클럽에서 이를 적용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언론은 더욱 무디어 1950년대까지도 2-3-5 시스템을 근거로 선수 포지션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역습을 좋아했던 채프먼의 전술은 사실은 점유율을 높여 경기를 주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채프먼의 꿈은 팀을 완전히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축구의 룰중 오프사이드라는 것이 있다. 오프사이드 룰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보다 왜 오프사이드 룰이 필요할까. 혹자는 오프사이드에 대해 축구가 농구나 핸드볼이 되지 않게 만드는 규칙이라고 말한다. 이번 이야기는 1920년대 영국으로 돌아가서 시작한다. 1866년 처음 제정된 오프사이드 룰은 패스를 받을 때 앞에 최소 두명의 필드플레이어가 있을 때 경기를 지속한다(온사이드)는 규칙이었다. 이후 반세기가 지나자 오프사이드 트랩은 경기를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가 돼 버린다. 영국은 롱볼과 드리블 위주의 경기를 진행해 왔다. 여기서 당시 경기는 오프사이드 트랩에 실패하더라도 드리블하는 최전방 공격수를 수비할 수 있는 또 한 선수가 존재했다. 노츠 카운티를 비롯한 일부 클럽에서 시작한 오프사이드 트랩을 활용한 전술은 점점 '지루한 영대영 게임'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특히 허즈페스와 맥크라켄이라는 걸출한 백을 보유한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점점 경기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1925년 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경기당평균실점은 2.58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런 재미없는 경기는 관중 감소로 이어져 클럽 존폐위기까지 몰리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남미는 조금 더 변화의 방향이 컸다. 1903년 아르헨티나 축구협회(AFA)는 축구업무 용어를 스페인어로 바꿨고 우루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미는 엘 토케(el toque - 터치기술)가 처음 발명된 곳이다. 남미축구의 평은 박했다. 새 스타일(남미 스타일)의 축구는 골문 가까이에서 지나치게 패스를 하면서 힘이 떨어진다는 평이다. 이것이 바뀐 계기는 1924년 우루과이 올림픽팀의 우승이다. 유고슬라비아와의 올림픽 첫 경기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은 비록 7:0으로 승리했지만 관람객은 2천명 가량이다. 그러나 짧은 숏게임과 활강을 연상케 하는 드리블은 앞도적인 경기력 차이로 스위스를 결승에서 3:0으로 누른다. 남미에서는 특정 선수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계속 전한다. 후안 에바리스토는 '마리아넬라(marianella - 발리 힐 패스)'를, 페드로 칼로미노는 바이시클킥을, 바르톨루치는 다이빙 헤딩을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모두 사실은 아니다. 바이시클킥만 해도 19세기 페루에서 사용했다는 설도 있고 라몬 운사가 아슬라가 1914년 처음 사용했다고 말하며, 페트로닐루 지 브리투가 개발했다고도 한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지금까지 피라미드 전술의 탄생과 진화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도 피라미드 전술에 대한 이야기다. 왜 피라미드 전술에 이렇게 긴 이야기가 필요할까. 바로 이 피라미드 전술에서 남미의 기술축구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이미 축구는 19세기 후반에 유럽과 남미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 축구전술은 비록 패스게임을 수용한 2-3-5 전술이지만 영국축구는 여전히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이고 1903~5년 사이 영국 클럽들의 유럽 순회경기에서 여전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중부유럽은 조금 달랐다.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숏패스 스타일이 정착한 것이다. 여기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일랜드 이주민 출신 스코틀랜드인인 지미 호건이다. 1950년대 헝가리팀의 감독(후일 헝가리팀의 전술도 기술할 예정)인 구스타브 세베시는 "지미 호건이 가르친 대로 했다."고 말한다. 번리 태생의 호건이 선수생활을 할 때 영국은 훈련을 싫어했다. 기본적인 체력훈련인 달리기 같은 것은 했지만 공을 갖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을 갖고 훈련을 하는 것은 해롭다는 말까지 있었다. 1904년 가장 많이 공을 갖고 훈련을 했던 토트넘은 일주일에 이틀만 공을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명과 11명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답은 너무도 단순하다. 거의 대부분 11명이 이긴다. 드리블과 패스게임의 차이는 이것이다. 공을 공급하는 선수가 윙에게 패스를 하고 윙에서 긴 패스를 하다가 포워드들에게 크로스를 올리고 이를 슛으로 연결하는 것이 이 때의 패스게임이다. 상대적으로 한 선수가 드리블을 하고 이를 저지하면 백업이 공을 이어받아 다시 드리블을 하는 것이 드리블게임이다. 패스게임이 드리블게임보다 효율적인 경기전술인 것은 당연하다. 또 하나가 전업선수의 등장이다. 1883년 블랙번 올림픽이 이튼 동문팀을 이기고 영국 FA컵에서 우승한 때에 우승을 이룬 것이다. 당시 블랙번 올림픽 팀은 전업선수로 만들어진 팀으로 이튼 동문팀은 윙에서 올라오는 크로스에 사실상 무방비상태가 돼 버렸다. 피라미드 시스템(2-3-5 시스템)은 바로 스코틀랜드에서 유래한 패스게임이 주류가 되어가는 시점에 등장한다. 어떤 글에서는 1883년 캠브릿지에서 처음 이 시스템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878년 웨일즈컵 결승전에서 드루이드에 맞서 싸운 렉섬이 센터하프를 사용했다는 신문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적어도 피라미드 전술은 그보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잠시 말년병장이 빠진 군대스리가 이야기를 해보자. 경기 진행은 간단하다. 고참이 공을 받는다. 멋진(멋지다고 생각되는) 메시처럼 온갖 개인기(정확하게는 앞에서 피해줌)로 골대를 향해 드리블을 통해 돌진을 한다. 갖 자대배치를 받은 이병이 공을 막는(시늉을 한)다. 호날두처럼 멋진 슛을 한다.(호날두의 무회전킥이 아닌 전혀 체중이 실리지 않아 무회전인 슛임) 골키퍼는 역모션에 걸려(걸린척하며) 아슬아슬하게 막지 못한다. 19세기 중반의 축구는 이와 비슷했다. 학급 상급생이 공을 몰며 공격을 한다. 1~2명의 하급생은 해킹(정강이 걷어차기)을 해서라도 이를 막는다. 패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된다. 이 당시 중요했던 것은 공격수가 태클로 공을 잃었을 때 이를 받아 계속 골문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축구전술에서 백업은 바로 이것이다. 대형은 이로서 정해진다. 가장 쉽게 머리 속에 그려 볼 수 있는 방법은 현재의 15인제 럭비에서 수비수 4명을 빼고 그림을 그리면 된다. 1866년 영국에서는 축구의 룰이 개정된다. 이 룰 개정에서 중요한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킹의 금지다. 아마도 이 룰이 없었다면 현재의 선수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축구 룰에서 가장 긴 항목이 있다. 대부분의 팬들이 알고 있는 오프사이드 룰이다. 오프사이드 룰은 간단히 말하면 앞에 서 있는 선수가 플레이 중 공이 올 때 그 전방에 상대 수비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볼데드상황이 되면서 공격권이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오프사이드 룰은 축구를 축구답게 만드는 하나다. 아니 오프사이드 룰이 없다면 축구는 무척 재미 없는 경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프사이드 룰은 1925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한다. 그 이전에 공 앞에 상대 필드플레이어가 2명 미만일 경우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한 명의 필드플레이어도 없을 때로 룰이 바뀐다. 최초의 전술시스템은 1925년 보다 훨씬 이전인 늦어도 19세기 중엽에 처음 탄생한 것이다. 이른바 피라미드 전술이라고도 불리는 2-3-5 시스템이다. 처음에는 10명 공격, 1명 수비(손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골키퍼 포지션으로 남은 자리)로 전술이라는 것이 없던 때부터 서서히 수비 숫자가 늘어나게 된다. 그러면서 2명의 수비를 후방에 배치하게 된다. 이 2명의 수비를 두는 것은 단순히 말해 일반적으로는 전방으로 패스를 하기 직전에는 적어도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는 숫자이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근대축구는 영국에서 시작했다. 영국에서 축구와 럭비는 기원이 같고 여기에서 공의 운반이 중요시되며 분화한 것이 럭비이다. 상대적으로 축구는 골키퍼를 제외하고 다른 선수는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타겟에 공을 넣는 경기로 진화하게 된다. 근대축구의 고향인 영국(잉글랜드, 앞으로 영국이라 표현하면 보통은 잉글랜드를 뜻할 것임)은 공을 골문으로 가져가는 개념이 강하다. 이는 같은 경기에서 분화한 럭비에서 짐작할 수 있다. 럭비는 전진패스가 불가능하다. 럭비는 상대의 육탄방어를 기술적으로 피해가며 공을 운반하는 경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잉글랜드 축구는 드리블과 돌파가 중심을 이룬다. 축구를 배울 때 제일 처음 듣는 전술이 바로 이것이다. 정확한 이름은 킥앤러시다. 그리고 이것은 중앙에서 한 명이 공격수에게 패스하고 양 윙이 드리블로 돌파해 크로스를 올리고 다른 공격수가 이를 슈팅으로 마무리 짓는 전술이다. 상대적으로 스코틀랜드는 다른 전술에 눈을 뜬다. 드리블 돌파보다 패스를 통한 전진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패스를 통한 전진은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역사상 최강팀으로 불리는 팀의 전술로 활용이 된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4-2-3-1, 4-3-3, W-M... 축구의 문외한일지라도 들어본 일이 있는 시스템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말한다. 축구의 전술을 숫자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22명이 공 하나를 놓고 싸우는 경기에서 나오는 무수한 조합을 전술로 말하는 것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선수 또는 감독이 미리 대비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유행하는 4-2-3-1 시스템이 눈에 보이는 순간은 골킥 상황에서 선수들이 중앙선에 모여 대형을 만드는 순간 정도일 뿐이고 다른 무수한 상황에서 이 대형을 꾸준하게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숫자 조합으로 대표되는 전술 시스템을 빼면 축구 그 자체를 말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전술을 살펴보기 힘들게 하는 상황은 잘못된 통계 역시 상당히 좌우한다. 골이 나오는 상황의 대부분은 3회의 패스 이전에 슛을 쏘아야 한다는 통계분석이 존재하고 있다(물론 이는 통계를 잘못 활용한 것이기도 하고 통계에서 80% 가량의 골이 5회 이하의 패스로 이뤄진다는 통계도 있기는 있다.). 또한 축구의 통계는 통상 10회의 크로스에 1회의 슈팅, 10회의 슈팅에 1골
문화저널코리아 = 조정일 기자 | K-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가운데 끊임없이 추구해온 한국 미술계의 아트페어가 오는 9월 1일 ~ 4일까지 인터컨티넨탈 호텔 서울 코엑스에서 제1회 K-아트페어로 열린다. 코엑스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10.11.12층)에서 열리는 K-ART FAIR는 82개 룸 70여 개 갤러리가 참여해 유명 작가 원작을 포함 미술작품 약 2,000점을 소개한다. 또한 특별전으로 20~30대 청년작가 공모를 통해 선정된 TOP 6 작가와 K-ART POWER 9 작가의 신작을 감상하고 소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청년작가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가 중 TOP 6 작가는 6백만 회원의 와디즈와 펀딩을 통해 작가를 홍보하고 작가의 원작과 한정 에디션 판화를 제작해 아트페어 오픈 전 사전 판매가 진행되며, 세계 미술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글로벌 작가의 발판을 만들어주고자 한다. 그 외, 순정 맨 작품으로 미소를 일으키는 김원근 조각 특별전과 미술시장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청년작가 탄산(TANSAN) 특별전도 펼쳐진다. 세계 미술시장의 통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시작된 K-아트페어는 "글로벌 탑 아트페어 ‘프리즈’와 국내 최대 국제 아트
문화저널코리아 = 이상수 기자 | 뮤지컬 마타하리 프레스콜 촬영 : 이상수, 편집 : 이상수
문화저널코리아 = 김한솔 기자 | 배우 이서환 인터뷰를 마련했다. 촬영 : 김한솔, 편집 : 이상수
문화저널코리아 = 이상수 기자 | 오는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동안 경상남도 양산시 황산공원 내 특설무대와 일원에서 ‘2022 양산 월드 힙합댄스 경연대회(World hiphop Avengers 2022 in YANGSAN)’가 열린다. 양산시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힙합문화협회 양산지부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2024년 파리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선정된 브레이크댄스를 전략적으로 지원하여 세계대회를 개최함으로 힙합 분야의 특성화된 양산시의 브랜드 위상을 높이며, 지역문화의 우수성과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예술 행사이다.
문화저널코리아 = 아르디 이안 기자 |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동안 경상남도 양산시 황산공원 내 특설무대와 일원에서 ‘2022 양산 월드 힙합댄스 경연대회(World hiphop Avengers 2022 in YANGSAN)’가 열린다. 이번 경연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비보이 곤조와 너리원의 축하 영상을 보내왔다. 양산시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힙합문화협회 양산지부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2024년 파리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선정된 브레이크댄스를 전략적으로 지원하여 세계대회를 개최함으로 힙합 분야의 특성화된 양산시의 브랜드 위상을 높이며, 지역문화의 우수성과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예술 행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