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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지워진 역사, 침묵한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나현, 연희동 초이앤초이서 개인전 개최

초이앤초이 갤러리 서울 이전 후 첫 전시… 3월 21일부터 4월 19일까지

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최근 삼청동을 떠나 서울 연희동으로 이전한 초이앤초이갤러리(공동대표 최진희 최선희)가 새 공간의 첫 문을 여는 전시로 작가 나현의 개인전 《아무것도 아닐거야(I don’t think it is anything)》를 개최한다. 전시는 3월 21일부터 4월 19일까지 열린다. 역사와 기억, 언어와 번역, 민족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 나현은 이번 전시에서 인간과 자연, 기록과 망각, 이동과 정착이 충돌하는 지점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사라진 목소리와 주변부의 흔적을 다시 호출하는 그의 작업은, 익숙한 역사 서사의 바깥에서 오늘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나현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자적인 궤적을 구축해 온 작가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인문학부에서 순수미술 석사를 취득했으며, 성곡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난지갤러리, 대구미술관, 문화비축기지, 갤러리 BK, Galerie Choi & Lager(쾰른), Künstlerhaus Bethanien(베를린), Cité Internationale des Arts(파리) 등 국내외 여러 기관과 공간에서 개인전을 열며 작업 세계를 확장해 왔다. 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경기도미술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청주시립미술관 등 주요 기관의 기획전에 참여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하종현 미술상, 서울문화재단 서울예술상 시각부문 최우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로도 선정된 바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구미술관, 청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옥스퍼드대학교 St Edmund Hall 컬렉션 등에 소장돼 있다. 제도권 미술의 성과를 이미 인정받은 작가이지만, 나현의 작업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제도와 역사, 언어와 기억의 구조 자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뒤집어 왔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장기간 이어져 온 프로젝트 **‘빅풋을 찾아서’**의 대형 설치 작업이 놓인다. 얼핏 신화적 상상력이나 미확인 존재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나현이 불러내는 ‘빅풋’은 단순한 전설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배제되며 보이지 않게 된 존재들의 상징이자, 폭력과 저항, 침묵과 생존의 흔적을 응축한 형상이다. 서로 다른 장소와 사건들을 연결하는 이 작업은 관객 앞에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은 정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혹은 우리가 외면해 온 것이야말로 역사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함께 소개되는 ‘포모사 프로젝트(Chulcho)’는 대만 타로막족과 파이완족의 자연관과 삶의 방식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식물 채집과 기록, 리서치 기반 설치를 통해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나 자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와 금기, 기억을 품은 살아 있는 구조로 제시된다. 이 작업은 생태를 단지 환경 문제의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의 삶과 문화, 공동체의 윤리와 연결된 문제로 확장시킨다.

 

또 다른 주요 출품작 ‘Walnut Babel Tower, 2013’는 ‘바벨탑 프로젝트’의 일부로, 베를린의 악마의 산과 서울 난지도를 연결하며 전체주의 근대사와 언어의 분화, 이주와 혼종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목재 구조물과 아카이브, 인터뷰 자료로 구성된 이 작업은 하나의 탑이자 기록 저장소처럼 기능하며, 서로 다른 문화와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을 시각화한다. 여기에 더해 ‘난지도 귀화식물’ 연작은 이동과 정착, 생태와 사회의 관계를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또 다른 층위로 확장한다. 귀화식물은 이 전시에서 생물학적 대상이 아니라 경계와 소속, 배제와 수용의 문제를 비추는 상징으로 읽힌다.

 

영상 작업 《Arbol》도 주목된다.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프로젝트의 일부인 이 작품은 쿠바에 정착한 한국인 후손들의 서사를 배경으로 사탕수수와 이주 노동의 역사, 퍼포먼스 드로잉을 결합해 ‘민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고정된 혈통이나 국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민족의 문제를 통해, 작가는 개인의 몸과 세계사의 흐름이 어떻게 서로 얽히고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각각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출발한 작업들을 통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무엇이 기록되고 무엇이 잊히는가, 누가 중심이 되고 누가 주변으로 밀려나는가, 인간은 자연과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나현은 사소한 오브제와 흔적, 주변부의 이야기들을 집요하게 수집하고 재배열하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역사적 의미를 끌어올린다. 그의 설치는 완결된 답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이 스스로 기억과 해석을 덧입히도록 열려 있는 구조를 택한다. 그래서 전시는 보는 행위에서 끝나지 않고, 사유를 시작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가 더욱 의미를 갖는 이유는 초이앤초이 갤러리 서울의 연희동 이전 이후 첫 전시라는 점이다. 2012년 독일 쾰른에서 출발한 초이앤초이 갤러리는 한국과 유럽을 잇는 폭넓은 아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국 현대미술과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국제 미술시장에 꾸준히 소개해 왔다. 2016년 서울 청담동에 지점을 연 뒤 삼청동을 거쳐 올해 연희동으로 자리를 옮긴 갤러리는, 새 공간의 출발점으로 나현의 전시를 선택함으로써 분명한 방향성을 드러낸다. 시장의 속도보다 사유의 깊이, 소비 가능한 이미지보다 시대를 꿰뚫는 질문에 방점을 찍겠다는 선언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전시 제목 《아무것도 아닐거야》는 그래서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쳐 온 흔적들,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사소한 목소리들,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주변부의 존재들이야말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강한 울림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나현은 늘 중심에서 밀려난 것들을 다시 호명해 왔고, 이번 전시에서도 그 특유의 집요한 리서치와 조형 언어를 통해 ‘보이지 않던 것들’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거야》는 단순한 개인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온 역사와 정체성, 자연과 공동체의 개념을 다시 묻는 하나의 장치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질서와 기억 역시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지워지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희동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시작된 이 전시는, 바로 그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오늘의 관객 앞에 선명하게 던지고 있다.

 

한편 초이앤초이 갤러리는 2012년 독일 쾰른에서 출발했다. 설립 이후 한국과 유럽을 잇는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지향하며, 한국에서 런던, 파리, 베를린, 제네바에 이르는 폭넓은 아트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쾰른 쥐트슈타트 지구에 자리한 2층 전시공간을 중심으로 다양한 작가들의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으며, 일부 작가들과는 작업 초기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의 과정을 함께해 왔다.

 

2016년 강남 청담동에 서울 지점을 오픈한 이후, 삼청동을 거쳐 2026년 연희동으로 이전한 초이앤초이 갤러리는 한국 현대미술과 한국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업을 국제 미술시장에 지속적으로 소개해 왔다. 전시와 아트페어를 통해 한국 현지 및 해외에서 활동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다채로운 면모를 해외 관객에게 선보이는 한편,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망 작가들을 한국 미술시장에 소개하며 장기적인 시각의 컬렉팅 문화를 제안해 왔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작가와 컬렉터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미술 생태계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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