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비어 있는 컵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다. 아직 차는 따르지 않았고, 누군가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어떤 시간을 품고 있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곧 시작될 가능성의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동양화가 루나양(본명 양윤정)의 개인전 《아직 오지 않는 그것을 위해》가 3월 17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팬덤어스아트갤러리(대표 정주연)에서 열린다. 전시 오프닝 리셉션은 3월 17일 오후 6시에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치는 ‘기다림의 시간’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케이크 틀과 타르트 틀, 컵과 접시 같은 사소한 사물들이 화면 속에 등장하지만, 그 사물들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담는 그릇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난 2013년 방배동 온리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이후, 약 13년 만에 다시 같은 인연의 공간에서 전시가 열리기 때문이다.
당시 온리갤러리는 지금의 팬덤어스아트갤러리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작가는 그 장소에서 다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가는 수많은 전시에 참여하며 꾸준히 작업 세계를 확장해 왔다.

정주연 팬덤어스아트갤러리 대표는 “2013년 처음 만났던 작가와 다시 전시를 열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며 “그 사이 작가의 작품 세계는 몰라볼 정도로 깊어졌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2013년 전시에서 작가가 작품과 함께 직접 만든 마카롱을 전시하고 판매했다는 점이다. 당시 작가는 그림뿐 아니라 디저트를 함께 선보이며 관람객들과 색다른 방식으로 소통했다. 그 경험은 이후 작가의 작업 세계에 은근히 남아 있었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케이크 틀과 타르트 틀, 컵과 접시 같은 쿠킹 도구들은 바로 그 기억에서 비롯된 이미지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작품 속 사물들도 어떤 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재료를 담고, 굽고, 식히고, 장식하는 과정은 결코 서두를 수 없다. 모든 것은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그 시간의 감각을 사물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어 있는 컵이나 타르트 틀들은 결코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위해 남겨진 자리이며, 기다림 속에서도 시간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구조다.” 이 문장은 이번 전시의 핵심을 설명한다.

보통 우리는 비어 있는 상태를 부족하거나 결핍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에게 비어 있음은 오히려 가능성의 상태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담길 수 있는 공간이며,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품고 있는 순간이다.
작품 속 컵이나 접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루나양의 작품은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인 장지 위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장지 특유의 질감 위에 얇게 쌓인 색채는 화면 전체에 은은한 깊이를 만든다. 색은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부드럽게 스며들며 사물과 공간 사이에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작품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색의 층이 천천히 겹쳐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시간이 쌓이듯, 색도 화면 위에 서서히 축적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작가가 말하는 ‘기다림의 시간’과도 닮아 있다. 빠르게 완성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천천히 만들어지는 시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매우 빠르게 움직인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종종 낭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루나양의 작품 앞에 서면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컵 하나, 비어 있는 타르트 틀 하나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안에서 이미 어떤 과정은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 말처럼 작품 속 사물들은 모두 ‘시작 직전의 순간’을 담고 있다. 아직 차가 따르지 않은 컵, 아직 구워지지 않은 케이크,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를 위한 자리. 그 모든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번 전시는 화려한 장면이나 극적인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아주 사소한 사물들을 통해 시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비어 있는 컵 하나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 담길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 기다림은 더 이상 공백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과정이 된다.
어쩌면 루나양의 그림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위해 남겨진 자리도 충분히 아름답다.”
한편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이번 전시는 잠시 멈춰 서서 시간을 바라보게 만드는 작은 여유를 선사한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기다리는 시간처럼, 조용하지만 깊은 사유의 순간을 만들어 주는 전시다.
전시는 3월 17일부터 28일까지 팬덤어스아트갤러리에서 진행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