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전쟁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격이 멎고 총성이 사라진 뒤에도, 인간의 기억과 책임은 과연 제자리를 찾았을까. 희곡읽기 모임 '돌클'의 1주년을 기념하는 낭독공연 '꿈'은 이 오래된 질문을 오늘의 관객 앞에 다시 꺼내 놓는다. 공연은 오는 2월 27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오후 4시와 7시 30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작품은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귄터 아이히(Günter Eich)가 1951년 집필·초연한 라디오극 '꿈'을 무대 낭독 형식으로 선보이는 공연이다. 아이히는 전후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폐허 문학(Trümmerliteratur)'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존엄, 언어의 책임, 기억의 윤리를 집요하게 탐구해왔다. 특히 라디오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났던 그는, 전쟁 이후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던 사회의 균열을 소리와 언어로 파고들었다.
'꿈'은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이다. 신문 광고를 따라 어딘가로 향하는 인물, 마을에 등장한 적(敵)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 탐험을 떠났으나 끝내 목적지를 되묻는 존재, 점점 가까워지는 정체 모를 소리를 마주하는 인물까지—각각의 꿈은 독립적인 서사를 지니면서도,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며, 무엇에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전쟁 직후의 독일 사회는 빠른 복구와 경제 성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히는 이 작품에서 위로의 언어 대신 경고의 목소리를 선택한다. 그는 권력의 남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기억을 지우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가 얼마나 쉽게 다시 폭력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꿈이라는 형식을 빌려 드러낸다.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공포와 불안은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아이히는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이 인간의 존엄을 자동으로 회복시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갑고도 단정한 언어로 말한다.
이번 낭독공연은 김광규 시인의 번역을 바탕으로 한다. 김광규는 오랜 시간 아이히의 시와 라디오극을 국내에 소개해온 연구자이자 번역가로, '말라스의 마지막 이름(외)', '귄터 아이히 연구' 등을 통해 그의 문학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해왔다. 이번 공연은 이러한 번역과 연구의 연장선 위에서 성사된 무대이기도 하다. 공연 제작진은 "아이히의 언어가 지닌 건조함과 긴장감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배우의 호흡으로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한다.
연출은 문새미가 맡았다. 낭독이라는 형식이 자칫 정적인 재현에 머물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며, 문새미 연출은 '읽기'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이자 사건이 되도록 무대의 리듬을 설계했다. 무대에는 이칸희, 양혜진, 정유미, 윤복인, 윤상화, 이미은, 김선화, 김기연, 이서원, 김영철, 강래연, 기환 등 다양한 세대의 배우들이 참여한다. 각기 다른 연기 이력과 목소리를 지닌 배우들은 인물의 감정을 과도하게 연기하기보다, 언어가 품고 있는 질문을 관객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이번 공연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작품 발표를 넘어 희곡읽기 모임 '돌클'의 1년을 정리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돌클’은 "배우들은 늘 목마르다"는 문장에서 출발했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의 호흡 속에서, 그리고 연습실에서 좋은 텍스트를 향해 느끼는 갈증이 모여 이 모임을 만들었다. 한때는 당연했던 '대본 읽기'가 점점 어려워진 시대, 이들은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돌보기 힘든 대본 읽기 클럽'이라 부르며, 좋은 희곡을 함께 읽고 토론해왔다. 때로는 그 결과를 무대에 올리며, 읽기와 실천을 병행해왔다.
'돌클'이라는 이름에는 우스갯소리 같은 가벼움과 동시에, 배우들의 연대라는 무게가 함께 담겨 있다. 이번 1주년 기념 낭독공연은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결과물이자, 앞으로도 계속 읽고 묻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어떤 질문을 무대 위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꿈'은 1950년대 독일의 이야기이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와도 낯설지 않게 맞닿아 있다. 성장과 효율, 망각이 미덕처럼 소비되는 시대 속에서, 이 작품은 "정말로 끝난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아이히의 차가운 목소리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건너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배우들의 입을 통해, 다시 관객의 꿈속으로 스며든다.
전쟁은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억과 책임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꿈'은 그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상기시키는 무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