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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예

"한 시대의 연기가 그의 몸을 통해 흘렀다"… 배우 이순재, 영원한 퇴장

69년 연기 인생의 마지막 장(章), 한국 대중문화사에 남긴 거대한 유산

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25일 새벽, 한국 연극·방송·영화계의 거목 배우 이순재가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직후 드라마 제작진, 연극계 동료, 방송인, 정치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깊은 애도를 표했다. 과장이 아니라, 이순재의 죽음은 한 명의 배우를 떠나보낸 사건이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린 역사적 순간으로 평가된다.

 

그는 ‘국민배우’라는 언어조차 부족할 만큼 필모그래피가 방대했고, 각 시대마다 새로운 이미지와 전성기를 만들어냈으며, 90대 초입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대한민국 최장수 현역 배우였다.
방송이 막 태동하던 시기를 몸으로 통과했고, 70~80년대 사극의 황금기를 일으켰으며, 2000년대 시트콤의 대중성을 한 단계 확장했다. 노년에는 다시 무대와 연출로 돌아와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자신을 증명했다.

 

이순재는 생전에 “배우는 늙지 않는다. 다만 경험이 쌓여 깊어질 뿐”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 ‘현재형’ 배우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오늘, 많은 이들은 질문한다.

“이순재 이후, 이순재 같은 배우는 다시 나오지 않는가?”

 

■함경북도 회령에서 서울 남대문 시장까지… 전쟁, 가난, 시대를 품은 소년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부모 대신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생년은 1934년이지만 호적상 1935년생.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해방을 맞았고, 뒤이어 6·25전쟁을 고등학교 1학년 때 맞아 전쟁의 공포와 혼란을 온몸으로 겪었다.

 

이순재는 “내 연기의 밑바탕은 전쟁이 남긴 경험”이라고 자주 말했다.
사람이 절망하는 순간, 희망의 작은 불씨를 어디서 찾는지… 그는 어린 시절 전쟁을 통해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연기는 어떤 대사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인물의 기쁨·아픔·비애가 깊은 결로 묻어났다.

 

그의 젊은 시절을 아는 지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이순재는 언제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삶 그 자체였다.”

 

■철학과에서 만난 ‘운명’: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이 만든 배우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당시 대학생들 사이의 저렴한 취미였던 ‘영화 보기’에 빠졌다. 그러다 영국의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기한 영화 햄릿을 본 뒤, 그는 인생의 방향을 수정한다.

 

“올리비에의 눈빛 하나가 연기였고, 철학이었고, 인간 그 자체였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저 길을 가야 한다고.”

 

이후 그는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무대를 경험했고,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공식 데뷔했다.
그리고 1965년, 그는 TBC 방송국 1기 전속 배우로 발탁된다. 이 순간은 한국 방송 드라마가 태동한 시기였고, 그는 그 중심에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써내려갔다.

 

■ 140편의 주연·조연, 800편이 넘는 출연작… 한 시대를 통과한 ‘연기의 아카이브’

 

이순재의 연기 인생은 단순히 ‘오래 활동했다’로 설명할 수 없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국 방송·연극·영화 역사의 백과사전이다.

 

단순 집계되는 주연·조연만 약 140편.
단역과 특별출연까지 합하면 800편 이상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실제로 1970~1980년대에는 하루에도 여러 작품을 동시 촬영했고, 한 달에 드라마 30편 이상을 찍은 적도 있었다.

 

대중에 각인된 대표작
• ‘사랑이 뭐길래’(1991~1992)
시청률 65%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가정 모두가 보던 국민 드라마. ‘대발이 아버지’는 단순한 캐릭터를 넘어 한국 가부장제의 초상을 상징하는 문화적 코드가 되었다.
• ‘허준’·‘상도’·‘이산’
사극에서 보여준 그의 중후한 카리스마는 한국 사극의 전형을 만들었다. 왕, 대신, 스승, 나라를 책임지는 어른의 무게를 완벽히 체현한 배우였다.
• ‘거침없이 하이킥’·‘지붕 뚫고 하이킥’
기존의 근엄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코미디 연기로 ‘야동 순재’라는 캐릭터까지 탄생시켰다. 이 시기 그의 팬층은 10대 초등학생까지 확장됐다.
• 예능 ‘꽃보다 할배’(2013)
‘직진 순재’, ‘순재 리더십’이라는 신조어를 남겼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도전 정신은 고령 사회 한국의 새로운 노년상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시대마다 다른 얼굴, 새로운 전성기, 장르마다 다른 연기 세계를 만들어낸 보기 드문 배우였다.

 

■사극의 왕, 생활 연기의 달인, 코미디의 혁신자… 끊임없이 확장한 연기 스펙트럼

 

이순재의 연기는 흔히 ‘중후하다’는 말만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넓고 다양했다.

 

▶사극에서의 이순재

 

사극 전성기를 일으킨 배우였다.
왕이나 대신, 혹은 국가를 지탱하는 ‘큰 어른’의 역할에서 그의 존재감은 유일무이했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장면의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는 평도 많다.

 

▶생활 연기의 정점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가 뿔났다’ 등 가족극에서도 그는 현실의 아버지를 연기하면서도 인물의 인간적인 모순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의 생활 연기는 때론 다정했고, 때론 고집스러웠고, 때론 불쌍했고, 때론 웃겼다. 그 힘이 시청자와의 ‘공감’을 완성했다.

 

▶70대에 다시 찾은 코미디

 

많은 배우가 고령에 접어들면 이미지 고착으로 인해 장르 확장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순재는 그 고정 이미지를 스스로 뒤집었다.
하이킥 시리즈를 통해 ‘한 인물의 웃음’이 아닌 ‘배우 이순재의 새로운 얼굴’을 폭발시켰다.

그는 “배우는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먹는 것”이라고 말하던 이였다.

 

■80대에 다시 무대로… 200분짜리 ‘리어왕’을 완주한 괴물 같은 체력

 

노년의 그는 텔레비전이 아닌 연극 무대를 다시 찾는다. 연극은 대사의 양이 많고 체력이 크게 소모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 ‘장수상회’(2016)
• ‘앙리 할아버지와 나’(2017)
• ‘리어왕’(2021)

 

특히 리어왕은 200분 분량의 긴 공연으로 유명하다. 당시 87세였던 그가 모든 대사를 완벽히 외우고 연기한 것은 “기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한 후배 연극인은 말했다.
“그날 무대 뒤에서, 순재 선생님은 누구보다 먼저 와서 대사를 되뇌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연극이었다.”

 

■연출자로의 도전… 89세, 체호프의 ‘갈매기’를 대극장에 올리다

 

2023년, 그는 처음으로 연출자로 나서 연극 갈매기를 무대에 올렸다.
대극장 연출이라는 큰 도전을 맡기에는 고령이었지만, 그는 모든 연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며 배우들과 소통했다.

 

“이제 내가 남길 것은 ‘연기’가 아니라 ‘연기의 방법’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연극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했다.

 

■정치인의 길… 그러나 결국 돌아온 배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에 발을 들였지만, 그는 네 해의 의정 활동을 마치고 연기자로 돌아왔다. 그는 “정치는 잠깐이었고, 연기는 평생이었다”고 회고했다.

 

배우로서의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정치란 잠시의 외도, 그러나 연기는 전생부터 이어온 숙명과 같았다.

 

■ 후배들에겐 엄격한 스승, 그러나 누구보다 따뜻한 어른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는 일관되게 강조했다.
• “배우는 태도로 증명된다.”
• “대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그를 ‘무서운 스승’이라 했지만, 동시에 ‘따뜻한 어른’이라 기억한다. 학생 누구에게나 직접 연습을 봐주고, 문자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곤 했다. 어떤 제자는 “선생님은 연기가 아니라 인생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시대를 살아낸 배우, 한국 대중문화의 한 축이 사라졌다

 

이순재의 별세는 단지 한 명의 배우가 떠난 사건이 아니다. 그는 텔레비전과 연극, 한국 대중문화의 성장 동력 그 자체였다.

 

그의 생애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정확히 맞물려 있다.
• 일제강점기 말기 출생
• 해방과 전쟁
• 산업화와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
• 민주화와 문화산업 성장
•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확장

 

그는 이 모든 흐름 속에 존재했고, 변화하는 시대마다 새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이순재라는 배우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한국 문화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일과 다름없다.

 

■“이순재는 사라졌지만, 이순재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연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얼굴, 목소리, 대사, 무대 위 몸짓은 수백 편의 작품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인다.

 

한국 드라마가 존재하는 한, 한국의 무대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연기를 꿈꾸는 젊은 배우들이 존재하는 한 이순재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불릴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고, 누구보다 정확하게 배우였으며, 누구보다 뜨겁게 삶과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렇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

 

이순재는 비록 마지막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인생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였고,
우리는 반세기 넘게 그 무대를 지켜본 관객이었다.

 

오늘, 한국 연기예술의 한 시대가 조용히, 그러나 깊은 울림과 함께 막을 내렸다.

고(故) 이순재. 그의 영면을 진심으로 기리며, 그의 삶과 연기, 그의 시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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