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69년 로마에서는 타콜라가 심잡음이라는 병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삼프토리아와의 경기에 출전해야했고, 보름 후 칼리아리와의 원정을 대비한 겨울철 해변훈련에 참여를 시켰다.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타콜라는 경기가 끝난 이후 탈의실에서 쓰러져 사망한다. 이외에 원정팀 숙소에서 팬들이 소란을 떨어 원정팀 선수들이 잠을 못이루게 하는 것은 비일비재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로지 이기기 위해 심판매수 등을 통해 승부조작을 했다는 의혹이다. 이미 유럽무대에서 이탈리아의 클럽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판정이 줄을 이어 심판매수 의혹은 있어왔다. 그리고 1974년 선데이 타임스에 심판매수의 증거들이 드러나게 된다. 라그란테 인테르의 종말의 원인은 그러나 이러한 추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칩거로 불리는 합숙훈련은 얼마간 경기력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장기간 계속된다면 경기력의 급격한 하락을 몰고 온다. 1966-67시즌 셀틱을 만난 인터밀란의 상황은 심각했다. 당시 오른쪽 플백이었던 부르니크는 3시간을 잤고 이것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자평했다. 그날 밤 그는 주장 피키(리베로)가 옆방에서 밤새도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강팀으로 적용한 케이스는 인터밀란이다. 당시 감독이던 포니는 오른쪽 윙인 아르마노를 밑으로 내려 상대 윙을 막게 한다. 아르마노는 후일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토르난티(tornanti, 귀환자들)라고 불린다. 토르난티는 원래는 윙이었으나 측면을 따라 내려와 수비를 돕는 윙을 말한다. 1952-53 시즌 인터밀란은 전년도 우승팀인 유벤투스에 비해 34경기에 득점은 27골이나 적은 46골을 넣었으나 단 24골을 잃었다. 1950년대 이탈리아 세리에A 우승팀의 평균 득점이 100골에 조금 못미쳤다는 점에 비해 8회의 1:0 승리와 4번의 0:0 무승부는 가히 "혁명적(브레라)"이었다. 유럽에 카테나치오를 알린 팀은 AC밀란이다. 의외로 로코가 이끈 AC밀란의 카테나치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지 않다. 1961-62시즌 우승팀 AC밀란은 당시 리그에서 두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린 로마보다 22골이나 많은 83골을 넣었다. 그러나 카테나치오는 오로지 이기기 위한 전술이라는 점에 변화는 없다. 1962-63년 시즌 유러피언컵에 나가 AC밀란은 악명을 떨친다. AC밀란을 상대한 팀 선수가 이 팀을 "머리 잡아끌기, 침 뱉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질문을 해보자. 축구팬에게 가장 싫어하는 전술은? 전세계 축구팬에게 가장 악명을 떨치는 이탈리아의 트레이드마크인 카테나치오다. 원래 이탈리아는 수비가 강한 팀이다. 1934년과 1938년 최초로 월드컵을 2연패할 때부터 이탈리아의 거친 수비는 정평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의 전술은 메토도라고 한다. 2-3-5 시스템에서 센터하프가 앙쪽 사이드하프의 뒤에, 양쪽 백 앞에 서 있는 전술이다. 1회 월드컵(1930년)에서 아르헨티나 대표로 뛴 몬티라는 선수를 영입해 전술에 중심에 놓은 시스템이다. 이전에 유벤투스에서 사용했고 대표팀에서는 몬티를 영입하면서 이 자리를 맡긴 것이다. 1934년 월드컵에서는 무승부가 없이 무승부일 때는 다음날 재경기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이탈리아를 만난 스페인은 첫날 무승부를 치른 이후 재경기에는 상당수 주전이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골키퍼였던 리카르도 사모라는 상대에게 두들겨 맞아 골절상을 입어 재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스위스에서 사용한 리베로 시스템을 끌어온다. 비엔나 출신 라판이 처음 적용했다고 하는 이 시스템은 2-3-5 또는 W-M 시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사람들은 1966년 영국팀을 4-3-3 전형으로 싸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영국 대표였던 노비 스타일스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을 수비형 미드필더인 앵커맨으로 기술한다. 그의 앞에는 피서트, 찰턴, 그리고 볼이 공격시 헌트와 그리브스를 지원하게 했다. 최근 기술하기 좋아하는 4라인 시스템으로 굳이 해석한다면 4-1-3-2가 되는 것이다. 이 4-4-2 시스템은 약팀을 상대로할 때는 다시 4-2-4로 전환한다. 물론 조금 더 강하게 몰아갈 때는 2-4-4 시스템으로까지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램지는 보통 강팀과 맞서기 위해 윙을 후퇴시켰다. 포루투갈과의 4강전에서 스타일스가 에우제비오를 전담한다. 스타일스의 경기는 2002년 한국의 김남일 선수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램지의 영국은 기존의 영국 스타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 팀이다. 가장 큰 차이는 이전 영국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윙을 뒤로 물러나게 해 윙 없는 경기를 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1966년을 기준으로할 때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공 점유율이 높은 팀이었다. 세번째는 3명의 미드필더의 공격가담은 순간적인 맨오버를 이끌어 위험한 상황을 만드는데 충분히 일조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먼저 4-2-4 전술에 대해 부연한다. 이 전술의 부모는 피라미드시스템(2-3-5)과 W-M시스템이다. 먼저 4-2-4 전술이 2-3-5 시스템에서 진화한 것이 틀린 말이 아니다. 양쪽 하프가 뒤로 물러나고 센터하프가 앞에서 커버플레이를 하는 것이 2-3-5에서 직접 4-2-4로 전환한 팀에서 보여준 전술이다. 대표적인 예가 1960년대 브라질의 수비시스템이다. 수비시 양쪽 하프가 내려가서 지역방어를 하는 것이 4명의 수비이고 센터하프는 수비진 앞에서 커버플레이를 한 것이다. 공격시는 왼쪽 하프는 플백 위치에서 전진을 해 미드필드를 강화한다. 공격 역시 5명의 공격수 중 양쪽 스트라이커(8번과 10번)가 내려온다. 그리고 왼쪽 공격수는 공격진 바로 뒤에서 공격을 지원하며 자유로이 침투 및 패스를 한다.(펠레) 오른쪽 공격수는 수비시 더 물러나 센터하프위치까지 내려간다. 공격시 센터하프보다 앞에서 공의 운반을 돕거나 공격을 지원한다. W-M시스템은 기존의 2-3-5에서 센터하프(이탈리아에서는 달라짐)를 뒤로 내려 센터백의 역할을 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수비수 5명은 위치를 변화시킨다. 센터하프는 완전히 빠져 볼트시스템의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축구의 선은 무엇일까. 경기에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박진감이 있는 경기일까. 만일 최고의 기량을 갖고 있고 경기를 완전히 지배했으나 10백이라는 수비전술 속에서 단 하나의 기습에 당한 팀이 축구의 선에 도달했을까. 아니면 늪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단단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한 골만 앞서면 잠그기에 들어가 이기기만 하면 될까. 1960년대 영국은 국제축구계에 복귀는 했지만 여전한 갈라파고스였다. 1960년 FC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에레라는 울버햄튼을 격파하면서 "영국축구는 진화단계가 빠져 있다. 오후 5시면 차를 마시는 것처럼 무엇이든 습관처럼 행동한다"라며 조롱한다. 1953년 헝가리의 아라니차파트에게 압도적인 경기력 차이로 진 영국에서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이것이 2-3-5 시스템으로의 회귀와 같은 방향성으로 가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그래도 역사는 진보한다. 영국의 축구 전술 역시 진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게다. 195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영국에서는 최초의 전술을 실험하여 성공한다. 짧고 긴 패스를 통해, 질서정연한 수비를 바탕으로 공격시 재빠른 위치변동을 통해 '맨오버(man ov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경기를 나가기 직전 페올라는 탈의실을 나가려는 지지를 붙잡고 다시 말한다. "명심해라. 첫 패스는 무조건 가린샤에게 보낸다." 20초후 가린샤는 공을 받았다. 상대 왼쪽 수비수가 다가오자 왼쪽으로 움직이려는 페인트 동작 이후 오른쪽으로 튀어나갔다. 몇차례 멈추고 속이고를 반복한 가린샤는 보이노프까지 제치고 좁은 각도에서 골대를 때르는 슛을 쏘았다. 1분후 펠레는 크로스바를 때렸고 다시 일분 후 지지의 스루패스를 받은 바바는 선취골을 만들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분이다. 1950년 우르과이에게 홈에서 패배한 브라질에서 8년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1949년 브라질 원정에 오른 아스널은 어이없이 패배한다. 당시 아스널 플백 스콧은 "갑자기 한 놈이 달려들어 골대를 엄청나게 벗어나는 슛을 때렸다. 우리가 누군지 찾아봤지만 못찾았다. 다만 플백이 유유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플백의 전진은 더욱 중요해졌다. 앞의 공간으로 치고 나갈 수도 있었고 커버플레이도 가능한 시스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맨투맨 수비를 버린 것이다. 맨투맨 수비를 버리자 수비진의 쏠림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두 명의 중앙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브라질은 우르과이에게 패하지만 않으면 우승을 하는 유리한 위치에 섰다. 당시 우르과이 감독인 로페스는 브라질이 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한 스위스에게 고전한 것을 보고 백이었던 곤잘레스를 스위퍼 위치로 옮긴다. 결국 브라질은 우르과이의 수비벽에 고전하다 후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 골을 넣는다. 그러나 우르과이는 미드필더까지 전진해 있는 왼쪽 백 비고데의 뒷 공간을 파고들어 역전에 성공한다. 월드컵 우승을 놓친 원흉으로 브라질은 '우연하게도' 3명의 흑인 선수(비고데, 주베날, 바르보사)가 지목된다. 바르보사는 죽을 때까지 이 시달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글 처음에 쓴 말을 남기고 죽는다. 하지만 1950년 브라질이 우르과이에게 패한 원인은 남미 팀과의 경기를 주로 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유럽스타일, 특히 스위퍼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과 공격적으로 전진한 한쪽 플백의 뒷공간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아무튼 1941년 플라멩고와 플루미넨세의 시스템으로부터 1950년 브라질 대표팀, 1951년 빌라노바 등의 시스템을 볼 때 브라질에서는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2000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축구선수가 죽으며 말했다. "브라질의 최고 형량은 30년이다. 그러나 나는 50년을 복역했다." 그의 이름은 바르보사.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때 우르과이에게 역전패할 당시의 골키퍼였다. 이번 이야기는 역대 최강팀으로 불리는 1960년대 브라질 대표팀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의 상황이다. 브라질 역시 19세기 후반 축구가 전해진다. 영국계 엘리트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축구는 벌써 1902년 리그가 도입 될 정도였다. 그리고 역시 패스 위주의 경기스타일이 주류를 이룬다. 영국식 축구에서 브라질 축구로 갈라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지만 현지인들이 축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영국계 브라질 선수들이 경기를 하면 근처 지붕에서 구경을 하던 현지인들은 길거리에서 천뭉치를 갖고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길거리 축구는 경기장 안과는 다르게 개인기 중심이었고 누구도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이를 본 누구는 "스코틀랜드였다면 그런 광대짓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어찌됐건 브라질 특유의 스타일은 벌써 1919년에 생겼다고 보여진다. 상파울루의 잡지 '스포르투스'의 창간호에 '영국은 골대에 최대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50년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사이 차이가 사람들이 생각하기 힘든 차이가 몇가지 존재한다. 어느새 클럽팀이 국가대표보다 더 큰 이슈를 몰고 다닌다. 많은 사람들은 리그가 FA컵보다 더 중요한 경기였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강팀을 이야기할 때 그러면 하얀발레라고 칭해지는 레알 마드리드 정도를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클럽팀은 어디가 있을까. 유럽 클럽 대항전 중 가장 무게가 있는 대회가 그 때도 챔피언스리그였을까. UEFA챔피언스리그는 1990년대 그 전에 있던 유럽컵을 확대시키고 컵위너스컵을 흡수하면서 현재 유럽에서 가장 권위있는 클럽대항전으로 성장했다.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럽컵은 현재의 위상에 비하면 초라했다. 그리고 현재는 패배자의 리그라고까지 평가되는 UEFA컵의 위상은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또한 가장 큰 권위가 있는 대회는 컵위너스컵이었다. 이것은 자국 클럽이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는 타이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1950년대 클럽들이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는 타이틀은 FA컵이다. 지금은 리그우승이다. 아무튼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1950년대 유럽의 최강 클럽을 꼽으라고 한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다시 한 번 히데쿠티의 말을 인용한다. "내 자리는 보통 자카리아스 옆의 필드 가운데 근처였고 다른 측면에 있던 보지크는 종종 상대 페널티 애리어까지 올라가서 꽤 많은 골을 넣기도 했다. 최전방에는 최고의 골잡이 좌우공격수 푸슈카시와 코치스가 있었고 W-M 시스템보다 골대에 더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새로운 얼개를 잠깐 실험하고 나서 세베시(감독)는 두 명의 윙에게 보지크나 내가 보내는 패스를 받기 위해 미드필드 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도록 했다. 이 마지막 손질로 전술개발은 완성되었다." 존스턴이 히데구티를 따라 올라가면 플백 사이에 구멍이 생겼고, 떨어뜨려 놓자 마음대로 경기를 지휘하며 휘젓고 다녔다. 웸블리에서 영국은 히데구티에게 헤트트릭을 허용하며 6:3으로 패배한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당시 히데구티에 가까운 현대 선수를 찾으라고 한다면 2000년 유럽컵에서의 지단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당시 헝가리는 푸슈카시, 히데구티, 코치시, 보지크, 치보르라는 당대 최고의 선수를 보유했고 이 뒤에는 세베시라는 감독이 있었다. 세베시의 전술노트에는 최고 선수들을 한 팀으로 묶어내기 위한 고민이 묻어난다. 센터하프인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조기축구회에 어느 날 프로 선수가 경기를 한다면 어떨까. 대여섯명의 선수가 들소처럼 콧김을 몰아쉬며 들이닥치는 모습에 골키퍼는 슛이 오기 전에 이미 위축되고 말 것이다. 1953년 11월 웸블리 구장에 있었던 영국 선수들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제의 선전도구로서의 축구는 적어도 서구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어버렸다. 또 하나는 축구 종가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갈라파고스화하던 영국 축구의 세계무대의 재입성(월드컵출전)일 것이다. 그리고 1953년 헝가리 축구팀의 영국 방문경기는 뜬금없는 '최강 잉글랜드' 신화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 경기가 된다. 1949년 자국에서 아일랜드에게 패한 것은 그러려니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것은 미주 원정이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53년 자국 팬들 앞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하면서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헝가리는 20세기 전반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당연히 부다페스트도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축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헝가리 축구 역시 유고 메이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34년과 1938년 월드컵의 우승팀은 이탈리아다. 당시 이탈리아가 최강팀인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전술로는 1회 때 아르헨티나의 센터백으로 뛰었던 몬티가 조금 더 수비적으로 옮겨갔다는 정도 빼고는 파시즘의 선전도구였다는 것에서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다. 또한 독일의 경우 W-M 전술을 받아들이고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역시 나치즘의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소련은 유럽의 변방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축구가 늦게 꽃을 피웠다. 소련 중심부는 국제적인 축구전술의 변화에 무감했다. 다만 서쪽은 지리적인 영향 때문에 다뉴비언 스쿨에 영향을 받았다. 1936년 처음 자국 리그를 출범시킨 소련은 이듬해 바스크팀의 방문(스페인 내전 중 바스크인의 뜻을 알리기 위해 펼친 순회경기)과 함께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소련 축구의 현주소를 뼈저리게 느낀다. 1무를 포함한 연패 속에서 소련은 자국 클럽의 상징인 스파르타크와의 경기에서 지금은 불가능한 일을 저지른다. 다른 클럽에서 선수들을 끌어 모은 것이다. 사실상 소련 대표팀이었던 당시 '급조된' 스파르타크는 또 하나의 급조된 전술을 사용한다. 센터하프의 수비위치로의 이동이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1939년 1월 구스타프 하르트만은 아가니세에 어느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남녀 한쌍이 있었다. 그때 이미 여자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고 남자는 하르트만이 발견했을 때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당시 독일에게 병합된 오스트리아 원더팀의 공격수 마티아스 진델라르다. 진델라르는 별명이 'der Papierene'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체로 센터포워드는 상대 수비의 육탄방어를 뚫을 수 있는 당당한 체구의 선수를 선호한다. 진델라르의 등장은 센터포워드가 섬세한 타이밍, 감각, 연습한 것 위에 쌓인 창의적인 발상을 함께 갖는 선수로 진화했음을 뜻한다. 당시 진델라르를 평한 평가는 어떤 방식의 플레이를 할 지 예상할 수 없는 천재성을 지닌 선수라는 것이다. 1920년대 닥터 게로컵에서 이탈리아에 이은 준우승을 거둔 유고 메이슬의 오스트리아는 이 천재적인 공격수, 진델라르를 선발하라는 압력에 시달린다. 이 압력 덕분에 진델라르는 1926년 국제무대에 데뷔를 했으나 메이슬은 처음에는 그다지 그를 중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1년경 메이슬은 진델라르를 붙박이로 쓰게 된다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채프먼 이전에도 센터하프를 현재의 센터백으로 내리는 일은 존재했다. 하지만 1925년부터 아스널에서 5년 임기를 보장받은 채프먼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에게 7대영 대패를 당하면서 시스템의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상대가 사용했던 전술, 다시 말해 센터하프를 수비 위치로 내리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 중앙에 선수가 부족해졌다. 이를 공격수에서 끌어내려 메운다. 기복은 있었으나 채프먼은 1930년 드디어 아스널을 FA컵 우승으로 이끈다. 1930년 아스널의 백은 좌우 윙어를 막았고 후퇴한 센터하프가 상대 중앙 공격수를 견제하고 윙하프는 상대 좌우 공격수를 막았으며 좌우 공격수는 뒤로 물러나는 전술을 만들어낸다. 바로 W-M 전술시스템이다. 이 전술은 1930년대 전반의 최강팀 아스널을 만들었고 새로운 영국 국가대표 시스템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영국클럽에서 이를 적용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언론은 더욱 무디어 1950년대까지도 2-3-5 시스템을 근거로 선수 포지션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역습을 좋아했던 채프먼의 전술은 사실은 점유율을 높여 경기를 주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채프먼의 꿈은 팀을 완전히
문화저널코리아 = 조정일 기자 | K-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가운데 끊임없이 추구해온 한국 미술계의 아트페어가 오는 9월 1일 ~ 4일까지 인터컨티넨탈 호텔 서울 코엑스에서 제1회 K-아트페어로 열린다. 코엑스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10.11.12층)에서 열리는 K-ART FAIR는 82개 룸 70여 개 갤러리가 참여해 유명 작가 원작을 포함 미술작품 약 2,000점을 소개한다. 또한 특별전으로 20~30대 청년작가 공모를 통해 선정된 TOP 6 작가와 K-ART POWER 9 작가의 신작을 감상하고 소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청년작가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가 중 TOP 6 작가는 6백만 회원의 와디즈와 펀딩을 통해 작가를 홍보하고 작가의 원작과 한정 에디션 판화를 제작해 아트페어 오픈 전 사전 판매가 진행되며, 세계 미술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글로벌 작가의 발판을 만들어주고자 한다. 그 외, 순정 맨 작품으로 미소를 일으키는 김원근 조각 특별전과 미술시장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청년작가 탄산(TANSAN) 특별전도 펼쳐진다. 세계 미술시장의 통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시작된 K-아트페어는 "글로벌 탑 아트페어 ‘프리즈’와 국내 최대 국제 아트
문화저널코리아 = 이상수 기자 | 뮤지컬 마타하리 프레스콜 촬영 : 이상수, 편집 : 이상수
문화저널코리아 = 김한솔 기자 | 배우 이서환 인터뷰를 마련했다. 촬영 : 김한솔, 편집 : 이상수
문화저널코리아 = 이상수 기자 | 오는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동안 경상남도 양산시 황산공원 내 특설무대와 일원에서 ‘2022 양산 월드 힙합댄스 경연대회(World hiphop Avengers 2022 in YANGSAN)’가 열린다. 양산시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힙합문화협회 양산지부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2024년 파리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선정된 브레이크댄스를 전략적으로 지원하여 세계대회를 개최함으로 힙합 분야의 특성화된 양산시의 브랜드 위상을 높이며, 지역문화의 우수성과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예술 행사이다.
문화저널코리아 = 아르디 이안 기자 |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동안 경상남도 양산시 황산공원 내 특설무대와 일원에서 ‘2022 양산 월드 힙합댄스 경연대회(World hiphop Avengers 2022 in YANGSAN)’가 열린다. 이번 경연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비보이 곤조와 너리원의 축하 영상을 보내왔다. 양산시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힙합문화협회 양산지부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2024년 파리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선정된 브레이크댄스를 전략적으로 지원하여 세계대회를 개최함으로 힙합 분야의 특성화된 양산시의 브랜드 위상을 높이며, 지역문화의 우수성과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예술 행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