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 2025년 추석 연휴는 예년과 달리 주말과 대체공휴일이 겹치며 무려 7일간 이어지는 역대급 ‘황금연휴’다. 멀리 해외로 떠나는 대신 가까운 국내에서 문화와 예술로 마음을 채우는 ‘전시 여행’이 새로운 선택지로 주목받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만의 여유를 찾아 떠나는 미술관·갤러리 나들이는 긴 연휴의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더한다.
여행지 대신 발걸음을 돌려볼 만한 주요 전시 4선을 소개한다. 기후 위기를 다룬 세계적 작가의 대전 개인전, 부산 해변을 무대로 펼쳐지는 공공미술제, 어린이와 어른 모두 즐길 수 있는 체험형 미술관, 그리고 ‘사회적 추상화’라는 독자적 언어로 국제 미술계를 주도해온 거장의 한국 첫 대규모 개인전까지, 어느 하나 놓치기 아까운 전시들이다.
■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를 예술로 마주하다
로랑 그라소 개인전 '미래의 기억들(Memories of the Future)'
대전 헤레디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의 개인전은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라는 보편적 주제를 예술적 상상으로 풀어내는 자리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회화와 네온 설치, 대형 LED 영상, 조각이 어우러지며 낯설고도 묘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대표작 '오키드 섬(Orchid Island)'은 대만 란위섬을 촬영한 영상에 검은 사각형을 겹쳐, 시적인 자연 풍경 속에 불안한 현실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작가는 이 검은 사각형이 “전쟁, 정치, 기후 위협을 상징한다”고 밝히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번 전시에는 루이비통과 협업한 회화 연작 **〈과거에 대한 고찰(Studies into the Past)〉**도 함께 선보여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허문다.
1922년 건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을 복원한 공간 헤레디움은 자체가 또 하나의 역사적 작품이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이름처럼 과거와 현재, 기억과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작품은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 부산 다대포 해변이 거대한 미술관으로 변신
'2025 바다미술제'
부산 사하구 다대포 일대가 가을 바다를 배경으로 다시 한번 세계적인 공공미술의 무대로 탈바꿈했다. ‘언더커런츠(Undercurrents): 물 위를 걷는 물결들’을 주제로 지난 9월 27일 개막한 바다미술제는 오는 11월 2일까지 37일간 이어진다.
다대포해수욕장과 고우니 생태길, 몰운대 해안산책로, 옛 다대소각장과 옛 몰운커피숍까지,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는 이번 전시는 ‘저항과 흔적, 회복’을 키워드로 공존의 메시지를 전한다. 국내 작가 김상돈, 이진, 조형섭, 신진 작가 최원교를 비롯해 독일, 칠레, 터키 등 17개국 작가 38명이 참여해 총 46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퍼포먼스와 어린이 체험 워크숍, 작품 연계 토론 프로그램 등 부대행사도 다채롭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예술과 자연을 동시에 만나는 경험은 연휴의 일상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 상상력으로 여는 예술 놀이터
에르베 튈레 전 '색색깔깔 뮤지엄'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상상톡톡미술관에서는 프랑스 출신 그림책 작가이자 창의 예술가 에르베 튈레의 체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책놀이’ 시리즈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상상력의 즐거움을 알려준 그는 이번 전시에서 선, 점, 낙서, 얼룩 등 자신의 시그니처 언어를 회화·영상·오브제에 담아냈다.
총 130점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은 단순히 보는 전시를 넘어, 관객이 직접 참여하고 상상하는 ‘예술 놀이터’로 꾸며졌다. 책 속 그림이 현실 공간으로 확장된 듯한 체험 공간, 미디어아트가 가득한 창의력 존, 직접 그리고 만드는 워크숍 공간이 마련돼 아이와 어른 모두 즐길 수 있다.
연휴에 가족과 함께 찾는다면 색채와 형태, 소리와 움직임이 뒤섞인 공감각적 체험 속에서 특별한 추억을 남기기에 제격이다.
■ 사회적 추상화의 거장, 한국 첫 대규모 개인전
마크 브래드포드 개인전 'Mark Bradford: Keep Walking'
서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신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전단지, 신문지 같은 도시의 부산물을 겹겹이 쌓고 긁어내며 대형 추상화를 완성하는 독창적 방식으로 ‘사회적 추상화(Social Abstraction)’라는 새로운 언어를 개척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20년 작업 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미술관 공간에 맞춰 제작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2025)를 비롯해 초기 대표작 〈파랑(Blue)〉(2005), 관람객이 작품 위를 직접 걸으며 체험할 수 있는 '떠오르다(Float)'(2019) 등 40여 점이 전시된다.
브래드포드의 작품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인종, 계층, 도시 공간의 문제를 담아내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그의 대규모 개인전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 황금연휴, 전시장에서 찾는 ‘두 번째 여행’
이번 추석 연휴, 국내 각지에서 열리는 굵직한 전시들은 멀리 떠나지 않아도 충분히 예술적 충만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공간 속에서 기후 위기를 성찰하는 대전, 바다와 예술이 어우러지는 부산, 상상력이 가득한 체험 미술관이 있는 서울 강북, 그리고 세계 미술계를 이끄는 거장의 신작이 펼쳐지는 서울 용산까지.
가족과 함께, 혹은 홀로 마주하는 작품 속에서 연휴의 의미는 또 한 번 확장된다. 여행 대신 전시를 선택하는 이번 추석, 문화 속에서의 '두 번째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