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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축구이야기] 축구전술의 역사 - 아약스 전성시대 ①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현대축구에 가장 영향을 미친 팀은 어디일까.

축구팬에게 강장 강렬한 인상을 끼친 팀은 1970년대 네덜란드 팀이다.

그리고 이 네덜란드는 아약스의 모습과 일치한다. 

 

고리타분한 네덜란드가 자유분방한 네덜란드로의 변화, 그리고 이 변화의 핵심인 아약스 스쿨의 전술변화는 현대축구가 필요한 연령별 전술진화와 그 긍극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클럽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네덜란드의 축구는 영국식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콧수염과 빅토리아시대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하고 있는 클럽의 사진을 보면 영국인지 네덜란드인지 혼동하기 쉬울 정도다. 

 

네덜란드는 다뉴비언 스쿨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피라미드 시스템을 사용한 팀이다.

문제는 이것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를 상대한 팀의 선수가 그렇게 넓은 공간이 생긴 적이 없었다고 감탄할 정도로 구태의연하고 성공적이지 못한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클럽의 변화가 1954년 제한적인 프로화와 1960년대 성장을 거쳐 197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은 단순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성장을 축구의 역사적인 사건과 연결지면서 읽어보면 어떻게 현대축구의 모습을 만들어냈는지가 짐작이 갈 것이다. 

 

네덜란드 축구의 아버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레이놀즈다.

영국 출신의 이 감독은 1915년 처음 아약스의 감독을 한 이후 32년간 세차례에 걸쳐 모두 25년간 감독에 있었다.

레이놀즈는 대단히 규율에 엄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약스 유소년 시스템을 만들면서 유소년부터 아약스까지 모든 연령 및 레벨의 팀이 똑같은 스타일의 축구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에게는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점유율을 높이는 축구를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을 가지면 지키고 공을 갖고 있는 이상 상대는 골을 넣을 수 없다는 철학이다.

레이놀즈는 아약스 선수들에게 공을 더 많이 소유하라고 주문했고 이것이 아약스의 철학이 된다. 

 

레이놀즈의 뜻은 1945년 만난 리누스 미헬스에게서 더욱 섬세해진다.

미헬스는 레이놀즈보다 훨씬 더 규율이 엄격했다.

미헬스가 처음 아약스를 맡았을 1965년에 이 팀은 강등권을 헤매고 있었다.

이런 팀을 다음해 리그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엄격한 규율을 세운 다음 일은 공을 갖고 하는 훈련을 늘렸다.

한마디로 선수 개개인의 기술을 키우는 것이 다음 작업이었다.

동시에 클럽 시스템을 현대적으로 변화시킨다. 

 

다음 할 일은 전술의 변화다.

W-M에서 4-2-4 전술로의 변화다.

여기까지는 1958년 이후 유럽의 추세 변화를 따라가는 모습이다. 

 

여기에 네덜란드의 시대적인 변화인 자유로움과 개인주의의 성향이 팀에 녹아들어간다.

팀의 리더 크루이프는 네덜란드 젊은이의 표상이 된다.

스메츠는 크루이프에 대해 "자신을 예술가로 이해한 최초의 선수였으며 스포츠와 예술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최초의 선수"라고 평했다.

프로보스(아일랜드의 과격한 군대로 자처하는 집단 또는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크루이프가 사실은 특히 가족적인 부분에서는 보수적이었다는 아이러니는 재미있는 여담 정도다. 

 

아무튼 히피문화의 중심지(오노 요코와 존 레넌의 알몸시위의 장소가 암스테르담임)에서 시스템과 개인의 창의성을 결합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네덜란드 축구팀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약스의 리더 크루이프 역시 무정부주의적인 모습과 제도를 농락하기 좋아하는 모습에서 프보보스의 모습을 상당히 연상시킨다.

이런 일화로 이미 푸마의 협찬을 받고 있던 크루이프가 1974년 월드컵에서 아디다스 유니폼을 거절한 것 등이 있다. 

 

1974년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언론은 현대축구에 길이 남는 용어를 만들어낸다.

그 이름은 totaalvoetbal이다.

토털축구다. 

 

토털축구가 나온 문화적 배경을 느꼈으니 전술적 진화과정을 다시 살펴본다.

미헬스가 먼저 추구한 것은 수비의 안정이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4회의 리그우승 사이에 나타난 문제는 공격수와 수비수를 중원에 지원을 나가도록 하자 미드필드에 지나치게 많은 선수가 몰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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