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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축구이야기] 축구전술의 역사 - 고장난 마퀴나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리버 마퀴나 또는 라 마퀴나(la maquina)라는 말이 있다.

1940년대 초반 리버 플라테의 경기를 보고 선수가 아니고 기계가 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붙인 별명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뛰었던 한 선수는 리버 플라테의 경기를 스탠드에 앉아 구경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아름답고 강했던 팀에게 붙여진 리버 마퀴나라는 별명은 낭만주의 시대의 잔영이라고 해야할까. 

 

수십년동안 국제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던 아르헨티나는 1950년대에 재등장하면서 잉글랜드를 물리치고, 1955년과 1957년에 연속으로 코파아메리카컵을 들어 올리면서 세계 최고의 축구팀이라고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이 자부심에 단 1년후 월드컵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만다.

첫 경기에서 전대회 우승팀 서독에게 1:3 패배는 그럴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 북아일랜드에게 3:1 역전승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으나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만신창이가 된다.

1:6이라는 성적표보다 더 큰 문제는 상대에 대한 무지와 팀플레이의 실종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라누에스트라라고 표현되는 전술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 변화는 지지 않는 경기로의 전환이다. 

 

1966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4-4-2 전형에서 미드필더를 다이아몬드형으로 꾸민다.

라틴은 뒤에서 팀의 중심을 잡아주었고 솔라리와 곤잘레스는 좌우에서 위아래로 폭넓게 움직였으며 오네가는 꼭지점에서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을 한다. 

 

1966년 월드컵 8강에서 영국에게 아르헨티나는 패한다.

서로 말은 많지만 적어도 경기 내용만을 보고 평하라면 스타일스가 오네가를 꽁꽁 묶었고 앨런볼이 아르헨티나의 왼쪽플백인 마르졸리니의 전진을 차단한 것이 원인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변화는 시스템이 아니라 스타일의 변화다.

1년후 대륙간컵에서 셀틱과 만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이싱과의 경기는 대단했다.

경기 전 벌써 셀틱의 골키퍼 심프슨은 몸을 풀다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고 교체됐다.

주심은 명백한 파울도 불지 않았고 석연치 않은 판정에 레이싱의 페널티킥골 이후 관중은 날아온 공을 잡고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몬테비오에서의 경기는 양팀 합계로 모두 5명의 선수가 빨간딱지를 받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의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는 다른 의미가 된다.

마치 파시즘 체제하에서의 이탈리아처럼... 

 

그리고 군사정권하의 아르헨티나 축구의 모습 역시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

이 역시 경기장 안에서의 역동적인 선수들의 모습이 제체의 역동성과 동일시하려던 이탈리아와 닮은꼴이다. 

 

압박과 높은 오프사이드라인만으로도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가 정작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추악한 폭력성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한 선수에 대한 평가인 "비열했다"라는 말로 갈음한다. 

 

1968년 대륙간컵 결승전에서 에스투디안테스과 만난 맨체스터유나이티드는 대단했다.

로는 상대가 머리카락을 끄집어 당긴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베스트가 배를 걷어차이고, 찰턴은 몇 바늘을 꿰메야 하는 반칙을 당했다.

머리가 찢어진 스타일스는 편파적인 심판에게 V자를 표시하고 경기장을 떠났다.

리턴매치에서도 로는 네 바늘을 꿰메야 할 정도의 다리 부상을, 열 받은 베스트는 휴고와 주먹다짐을 했다.

이렇게 당한 팀으로는 역시 더러운 경기로는 빠지기 힘든 AC밀란 역시 해당된다. 

 

이런 폭력적인 경향은 1973년에 들어서야 변화하기 시작한다.

1976년 페론정권을 물리친 쿠데타 정권에서 반동적인 모습이 있었으나 이미 경기장 내 폭력성에 지겨워했던 팀은 변화하고 있었다. 

 

후일 1978년 월드컵의 성과를 정권이 이용하자 감독이었던 메노티는 "우리의 승리를 그 옛날 찬란했던 아르헨티나 축구에 바친다"며 "자신의 축구는 군사정권 이전에 자유롭고 창의적인 아르헨티나를 떠올린다"고 했다. 

 

하지만 메노티의 아르헨티나 팀은 특히 결승전에서 4년전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냈던 쿠르이프가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해 불참한 네덜란드와 만나면서 온갖 부정행위 속에서 승리한다.

적어도 메노티가 말한 라누에스트라는 그 때의 결승경기와 거리가 많다.

서울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만큼의 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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