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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축구이야기] 축구전술의 역사 - 아라니차파트 ①

 

문화저널코리아 = 이기현 칼럼리스트 |  조기축구회에 어느 날 프로 선수가 경기를 한다면 어떨까.

대여섯명의 선수가 들소처럼 콧김을 몰아쉬며 들이닥치는 모습에 골키퍼는 슛이 오기 전에 이미 위축되고 말 것이다.

1953년 11월 웸블리 구장에 있었던 영국 선수들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제의 선전도구로서의 축구는 적어도 서구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어버렸다.

또 하나는 축구 종가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갈라파고스화하던 영국 축구의 세계무대의 재입성(월드컵출전)일 것이다.

그리고 1953년 헝가리 축구팀의 영국 방문경기는 뜬금없는 '최강 잉글랜드' 신화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 경기가 된다. 

 

1949년 자국에서 아일랜드에게 패한 것은 그러려니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것은 미주 원정이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53년 자국 팬들 앞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하면서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헝가리는 20세기 전반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당연히 부다페스트도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축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헝가리 축구 역시 유고 메이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W-M 시스템 아래서 센터포워드는 생각보다 힘이 넘치고 용감한 선수가 맡아야 하는 자리라는 선입관이 있다.

그러나 1940년대 헝가리에서는 우람한 최전방 공격수를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헝가리에서는 결국 대형 공격수를 키우던지 아니면 W-M 체제의 견고한 수비방식을 유지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헝가리에서는 W-M 시스템에서 W를 뒤집은, M-M 시스템을 만들게 된다.

중앙공격수가 미드필드 진영으로 물러나면서 두 명의 윙은 전방으로 치고 나가면서 유동적인 4명의 공격진이 만들어진다. 

 

웸블리에서 영국에게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이긴 헝가리의 9번 히데구티는 "중앙공격수가 공간이 있는 자리로 내려와 플레이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아직도 당시 헝가리 팀의 히데구티를 처진 공격수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이는 등번호 때문에 생긴 오해이고 공격형 미드필더로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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