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초봄의 공기가 아직 차갑게 남아 있던 지난주 토요일 오후, 대전 원도심 한 켠에 자리한 헤레디움 미술관은 평소보다 한층 느린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00년의 시간을 품은 붉은 벽돌 건물은 낮은 햇빛을 받아 묵직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외부의 시간과는 다른 결의 공기가 감돌았다. 전시장 내부는 고요했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들은 말을 아끼고 대신 오래 머물렀다. 시선은 천천히 이동했고, 공간은 하나의 '사유의 장'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전시 "미완의 지도 (Tracing the Unfinished)" 오프닝 현장에서 관람객들 사이를 지나 조용히 공간을 살피던 함선재 관장을 만났다. 그는 작품에서 시선을 거두며 이렇게 말했다.
"전시는 결국, 관람객이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컬렉터의 선택, 또 하나의 큐레이션"
이번 전시는 컬렉터 그룹 아르케Ⅱ(회장 한송이)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큐레이터의 기획이 아닌, 시간 속에서 축적된 선택의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함 관장은 이를 '또 하나의 큐레이팅'이라고 정의한다.
"이번 전시는 명확한 기획 의도를 앞세운 전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선택들이 모여 만들어진 구조입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큐레이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컬렉션을 단순한 취향의 집합이 아닌 '사유의 축적'으로 해석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했느냐보다, 왜 그것을 선택했느냐입니다. 그 안에는 동시대 미술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 서로 다른 시대의 충돌,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의미
전시장에는 르 코르뷔지에, 데이비드 호크니, 데이미언 허스트 등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을 지닌 작가들의 작업이 한 공간에 놓여 있다.
이질적인 조합은 의도된 긴장이다.
"동시대 미술은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들이 충돌하고 공존하는 상태입니다. 그 차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합니다."
그는 작품 간 '관계'를 강조했다.
"작품은 고립되어 있을 때보다 관계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관람객은 그 사이를 이동하며 스스로 해석을 만들어갑니다."
□ "이곳은 시간을 쌓아두는 공간입니다"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축은 바로 공간이다. 헤레디움 미술관은 근대 건축의 흔적을 간직한 채 재생된 장소로, 단순한 전시장이 아닌 '시간의 구조물'에 가깝다.
"이곳은 시간을 지우지 않고 쌓아두는 공간입니다. 과거의 흔적 위에 현재의 예술이 놓이면서, 관람객은 여러 층위의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공간이 전시의 '배경'이 아니라 '해석 장치'라고 말한다.
"화이트 큐브에서는 작품이 중심이 되지만, 이곳에서는 공간 자체가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건축의 시간성과 질감이 작품과 만나면서 새로운 층위를 형성합니다."
□ "좋은 전시는 질문을 남깁니다"
함 관장은 전시를 '질문을 설계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좋은 전시는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관람객이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합니다.”
그는 '이해'보다 '사유'를 강조한다.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 앞에서 어떤 감각과 생각이 시작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전시 제목 '미완의 지도'는 이러한 철학을 상징한다.
"완성된 것은 멈춰 있지만, 미완의 상태는 계속 확장됩니다. 전시 역시 하나의 과정으로 남겨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가 기울 무렵, 전시장 안의 빛도 서서히 낮아졌다. 붉은 벽돌 벽면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관람객들의 움직임이 잔잔하게 이어졌다. 작품 앞에 선 이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돌아가듯 전시를 다시 따라 걸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함 관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시는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어떻게 기억되고 이어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내려앉은 대전의 거리 위로 전시의 여운이 길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의 잔상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남겨진 질문의 형태였다.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문득 떠오르고, 어떤 장면이나 감각과 맞닿으며 다시 변주된다.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이미지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결로 남아,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또렷해지기도 한다.
헤레디움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그렇게 개인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 또 다른 '내면의 전시'로 이어진다. 전시장에서 끝난 감상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 확장되는 사유의 과정으로 남는 것이다.
어쩌면 '미완의 지도'란 처음부터 완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구조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끊임없이 덧그려지고 지워지며,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열린 도식에 가깝다. 전시를 본 모든 이들이 저마다 다른 좌표를 남기고, 그 좌표들이 겹쳐지며 하나의 보이지 않는 지형을 만들어간다.
그 지형 위에는 정답도, 고정된 경로도 없다. 다만 각자가 지나온 흔적과 그때의 감각, 그리고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생각들이 층층이 쌓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전시는 비로소 완성되지 않은 채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