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코리아 오형석 기자 | 국립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의 인장을 받은 ‘국립극단 표’ 희곡들이 오는 26일부터 28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낭독공연으로 오른다. 지난해 15년 만에 재개해 한국 연극계의 ‘원조’ 극작가 등용문의 부활을 알린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의 첫 수상작들이다.
국립극단은 2024년 대상 1편 3천만원, 우수상 2편 1천만원씩 총 5천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15년 만에 현상 희곡 신작 공모를 부활시켰다. 1957년 시작된 국립극단의 창작희곡 현상 공모는 <딸들, 연애 자유를 구가하다>(1957), <만선>(1964), <가족>(1957) 등 국립극단의 주요 레퍼토리 작품을 발굴하고, 당시 연극계에서 거의 유일한 신인 극작가 등용문으로서 이용찬, 천승세, 하유상 등 한국 연극사에 이름을 남긴 대문호들의 첫걸음을 함께했다.
그 명성에 걸맞게 국내 현존하는 미발표 희곡 중 최대 상금 규모라는 화려한 명목으로 공모를 재개한 국립극단은 첫해 총 303편의 희곡을 신청받았다. 101 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김주희 작가의 <역행기(逆⾏記)>가 대상을, 배해률 작가의 <야견들>과 윤지영 작가의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가 우수상을 수상했다. 당시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심사위원회는 “상식이 전도되고, 폭력이 농담같이 가해지고, 대화가 모욕받는 시대에, 인물들을 고집스럽게 대화로 연결 짓는, 대화의 연결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게 하는 희곡들을 만났다”라고 수상작들을 평가했다.
![지난해 12월 30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2024년 국립극단 창작 희곡 공모] 시상식<br>
기념사진을 촬영 중인 수상자들과 심사위원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조만수/김은성/박정희/김호정/김민정 심사위원, 윤지영(우수상)/김주희(대상)/배해률(우수상) 수상자)](http://www.cjknews.com/data/photos/20250937/art_17573653244526_c9e8b0.jpg?iqs=0.15911348927956248)
지난해 시상대에 올랐던 3편의 수상작은 오는 26일부터 28일까지 하루 한 작품씩, 삼 일간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의 무대를 드라마의 축제로 빚어낸다. 9월 26일 낭독공연의 첫 문을 여는 작품은 윤지영 극작, 최용훈 연출의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다.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는 ‘여수순천 10.19사건’을 모티브로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한평생 무표정한 얼굴과 매일의 소주 한짝으로 슬픔을 삭여온 할아버지의 자전적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희곡이다.
1948년 가을 순천을 배경으로 서울로 상경해 첫사랑 ‘경희’를 찾겠다는 열두 살 ‘귀복’의 꿈은 항쟁의 혼란 속에서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총성과 불길이 이어지는,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이 이어지는 곳에서도 시간은 무심히 흘러 ‘귀복’은 어느새 여든여덟의 노인으로 앉아있다. 잊고 싶었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 특히 형의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리며 ‘귀복’은 다시 한번 깊은 죄책감을 마주한다.
극단 작은 신화의 대표로 한국 연극의 세대교체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최용훈이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 낭독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올해 데뷔 39년째를 맞은 최 연출은 번역극을 주로 공연하던 80년대 말 90년대 초 창작극 개발에 힘을 쏟으면서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인물이다. 1994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시작으로 영희연극상, 히서연극상, 김상열 연극상, 동아연극상, 한국연극협회 작품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작품상, 올해의 연극인상 등 숱한 연극상을 수상하며 한국 연극계의 또 다른 거목으로 연극 발전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극 창작 시스템과 예술적 시도가 부재했던 시대적 상황에서도 실험적 시도와 공동 창작 등 우리 극 만들기를 주도하면서 젊은 연극인들의 선망 대상이자, 신인 극작가와 신진 연출들을 연극 무대로 견인한 최용훈이 이번 낭독공연의 시작을 여는 바는 뜻깊다. 최용훈 연출을 비롯해 이번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선정작 낭독공연의 각 연출은 한국 연극의 미래를 견인할 작품들의 탄생이라는 공모의 의미와 수상 희곡이 가진 고유의 색깔을 무대화하는 데에 고심을 거듭해 선정됐다.
배해률 극작의 <야견들>이 9월 27일 낭독공연으로 무대에 올라 웰메이드 희곡의 감동을 이어간다. 무대에 섬세하고 빛나는 세계의 집을 지어온 배해률 작가는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이후 3년 만에 <야견들>의 낭독공연으로 국립극단 관객을 다시 찾는다.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는 공연 당해인 2022년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악의와 이기심을 끌어안은 채로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작가가 쓰기 시작했다는 <야견들>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퀴어한’ 존재들을 이야기한다. 안개 짙은 농무산 자락에 자리한 깊은 산골 외딴 여관에 모던걸 복장을 한 의문의 사내 ‘김시우’가 쓰러진 채 발견된다. 징용을 피해 도망쳐 온 ‘김시우’는 여관 식구들에게 바깥세상의 희망을 불어넣지만 순사를 비롯해 ‘김시우’를 쫓는 사람들로 고요한 마을은 순식간에 서슬 퍼런 감시와 폭력의 그림자 속에 휩싸인다.
<야견들> 낭독공연의 연출은 윤혜진이 맡았다. <목련풍선>, <잘자라랄라>, <X의 비극>, [슈퍼 파워] 등 상처 입은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깊은 공감력과 치유 과정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데 탁월한 감성을 지닌 윤 연출은, 이번 <야견들>의 낭독공연으로 야욕과 위선을 무너뜨리는 의지와 동행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선사할 예정이다.
9월 28일, 대상작인 <역행기(逆⾏記)>가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선정작 낭독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특히 <역행기(逆⾏記)>는 내년 국립극단 시즌 라인업에 편성돼 본 공연화될 예정으로 이번 낭독공연을 접하는 관객들은 2026년 국립극단 시즌 라인업의 단편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역행기(逆⾏記)>는 작가 김주희가 극작한 작품으로 수상 당시 “이야기가 요구하는 상상적 공간의 스케일, 그리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제의 다층성을 감안할 때 대작이라 부를 작품이다”라는 평을 받으며, 희곡이 품고 있는 무대 예술적 규모에 기대를 더했다.
주인공 ‘인안나’를 비추며 시작하는 <역행기(逆⾏記)>는 ‘인안나’가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지하세계로 역행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수메르 신화를 바탕으로 미지의 인물들과 신화적 요소들이 등장하며 과거와 미래, 인간과 비인간을 넘나드는 작품은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여정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 여정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억압으로 밀려난 목소리를 찾기 위해 깊은 어둠 속을 헤집는 과정이며 지하세계로 하강한 하늘과 땅의 여신을 되찾기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여정의 끝에는 여성과 비인간 자연이 결합된 몸으로 서 있고 세대별 여성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낯설지 않은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변주와 현대적 재해석으로 인간의 강렬한 욕망과 감정을 자유자재로 무대에 풀어놓고 관객에게 과감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신재훈이 <역행기(逆⾏記)>를 연출한다. <오셀로와 아이고>, <틴에이지딕>, <금조이야기>, <견고딕-걸>, <멕베스> 등 희곡이 줄 간 사이에 품고 있는 미세한 파동의 의미조차 놓치지 않는 신재훈 연출이 그려낼, 100페이지가 꼬박 넘는 대규모의 드라마 <역행기(逆⾏記)>의 첫발자국이 단연 기대를 모은다.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원석의 희곡이 무대의 옷을 입고 관객과 만나는 빛나는 보석같은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국립극단의 이름을 내걸고 무대에 서는 이 희곡들이 한국 연극의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삼 일간의 펼쳐지는 드라마의 축제에 많은 관객분이 함께 해주시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각 공연 종료 이후에는 작가와 연출이 함께하는 예술가와의 대화가 마련되어 있다. 3편의 낭독공연을 모두 유료로 관람한 관객에게는 유료티켓을 실물로 제시하면 낭독공연의 희곡이 담긴 희곡선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준비돼 있다.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선정작 낭독공연은 국립극단 홈페이지에서 예매 가능하다.(문의 1644-2003/전석 1만원)